이 영화를 처음 틀었을 때 30분 만에 끄려다 참았습니다. 등장인물이 쏟아지는데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뭔가 B급 냄새가 진하게 났거든요. 그런데 그 30분을 버텼더니, 나머지 90분이 보상처럼 펼쳐졌습니다. 가이 리치가 데뷔작에서 이미 완성된 스타일을 들고 나온 영화, 1998년작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입니다.시나리오 구조 — 퍼즐처럼 맞춰지는 앙상블의 힘이 영화의 핵심은 앙상블 캐스팅(ensemble casting)에 있습니다. 여기서 앙상블 캐스팅이란 주인공 한 명이 아니라 여러 인물군이 각자의 독립된 이야기를 끌고 가다가 후반부에 하나로 수렴하는 구조를 뜻합니다. 에디·톰·베이컨·소프 네 명을 중심으로, 갱단 두목 해리, 마리화나 농장주 롤리 브레이커, 멍청한 콤비 딘과 게리, 장물아비 ..
반전을 알고 보는 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큰 불행입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 기대가 너무 컸습니다. 주변에서 하도 반전 반전 하니까 오히려 의심하면서 보다가, 중반을 넘기기도 전에 범인을 찍어버렸습니다. 그 순간부터 영화가 '추리'가 아닌 '확인'으로 바뀌어 버렸고, 재미가 절반쯤 날아갔습니다.반전을 알고 본 사람의 후회저는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이미 반전 영화라는 정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문제였습니다. '언제 뒤집히나' 하는 마음으로 보다 보니 자꾸 의심이 앞섰고, 결국 케빈 스페이시가 범인이라는 걸 중반부에 스스로 납득해버렸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영화일수록 정보 없이 보는 게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이 영화는 1995년 선댄스 영화제(Sundance Film Festival)에서 처음 주목받았습..
기억을 지우면 사랑도 사라질까요. 이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이터널 선샤인을 처음 봤을 때 저도 막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지워도 다시 끌리는 두 사람을 보면서, 사랑이 기억에 있는 게 아니라 몸과 습관 어딘가에 새겨지는 것이 아닐까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비선형 서사가 처음엔 낯설었습니다이터널 선샤인의 이야기 구조는 선형 서사와 정반대입니다. 선형 서사란 시간 순서대로 사건이 전개되는 방식인데, 이 영화는 그 반대로 현재와 기억 삭제의 역순이 동시에 뒤섞여 흐릅니다. 처음 보는 분들 중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시는데, 저도 첫 관람에서 타임라인을 완전히 놓쳤습니다.영화는 사실상 2월 13일부터 2월..
솔직히 저는 37년 동안 이 영화 제목을 몰랐습니다. 중학교 3학년 어느 여름밤, TV에서 우연히 봤던 그 장면들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는데도요. 청바지에 스트라이프 줄무늬 흰 긴팔을 입고 빠르게 걷던 소녀, 그리고 그 엔딩의 여운. 결국 AI에게 기억나는 장면들을 설명해서 제목을 찾아냈고, 드디어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40년 가까이 묵혀뒀던 숙제가 풀린 느낌이었습니다.샤를로트 갱스부르의 데뷔작, 그 시절의 얼굴제가 이 영화를 다시 찾아보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샤를로트 갱스부르라는 배우였습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작품들, 그러니까 안티크라이스트나 멜랑콜리아, 님포매니악에서 보여준 그녀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게 남아있었거든요. 극한의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배우라는 인상이었는데, 그 배우가 한때 ..
1950년 플라스틱 생산량은 연간 200만 톤이었습니다. 2020년에는 그 150배인 3억 톤이 만들어졌습니다. 처음 월-E를 봤을 때는 그냥 눈물 찔끔 나는 귀여운 로봇 영화였는데, 이 숫자를 알고 나서 다시 보니 기분이 묘하게 달라졌습니다.2050년의 쓰레기 산, 이미 예고된 현실월-E에서 쓰레기가 건물 높이까지 쌓인 지구 풍경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솔직히 "설정이 좀 과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2008년에 개봉한 영화니까 당시 기준으로는 꽤 비현실적인 상상력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수치를 놓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2050년까지 전 세계에서 누적 생산될 플라스틱은 약 340억 톤으로 예측됩니다. 그중 3분의 1인 약 120억 톤이 쓰레기로 전환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합니다. 영화 속 2..
이 영화를 가볍게 보다가 중반부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톰 크루즈, 페넬로페 크루즈, 카메론 디아즈가 한 화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볼 이유가 충분한데, 정작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그보다 훨씬 묵직했습니다. 꿈과 현실의 경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 영화 한 편이 이렇게 오래 머릿속에 남을 줄은 몰랐습니다.꿈과 현실, 어디서부터 무너지는가영화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주인공 데이빗이 살인죄로 수감된 채 정신과 의사와 면담을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하거든요. 얼굴에는 가면을 쓰고 있고, 의사는 그의 과거를 끌어내려 합니다. 저는 이 오프닝 나레이션을 듣는 순간부터 뭔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지금도 그 OST가 가끔 생각날 정도니까요.데이빗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