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전을 알고 보는 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큰 불행입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 기대가 너무 컸습니다. 주변에서 하도 반전 반전 하니까 오히려 의심하면서 보다가, 중반을 넘기기도 전에 범인을 찍어버렸습니다. 그 순간부터 영화가 '추리'가 아닌 '확인'으로 바뀌어 버렸고, 재미가 절반쯤 날아갔습니다.
반전을 알고 본 사람의 후회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이미 반전 영화라는 정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문제였습니다. '언제 뒤집히나' 하는 마음으로 보다 보니 자꾸 의심이 앞섰고, 결국 케빈 스페이시가 범인이라는 걸 중반부에 스스로 납득해버렸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영화일수록 정보 없이 보는 게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
이 영화는 1995년 선댄스 영화제(Sundance Film Festival)에서 처음 주목받았습니다. 선댄스 영화제란 미국 유타 주에서 매년 열리는 독립영화 축제로, 상업성보다 작품성 중심의 영화들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오는 무대입니다. 당시 제작비가 약 100만 달러에 불과했고,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투자를 꺼렸습니다. 유럽 자본으로 겨우 완성된 저예산 독립영화가 영화사를 바꿔버린 셈입니다(출처: Sundance Institute).
이 영화의 핵심 구조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입니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란 이야기를 전달하는 인물 자체가 거짓말을 하거나 정보를 왜곡하고 있어서, 독자나 관객이 그 진술을 100% 믿을 수 없는 서사 기법을 말합니다. 버벌 킨트(Verbal Kint)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힌트입니다. 'Verbal'은 영어로 '말에 의한'이라는 뜻이니, 이름부터 '구라를 잘 치는 사람'을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이름이 범인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는데, 저를 포함한 많은 관객들이 그걸 그냥 넘겼습니다.
화자의 증언으로 만들어진 영화
이 영화의 구조가 특이한 이유는 영화 전체가 단 한 사람의 진술에 의존한다는 점입니다. 산 페드로 부두의 폭발 사고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버벌이 취조실에서 형사 쿠얀(Kujan)에게 사건 전말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영화 내내 보는 장면들이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버벌이 '그렇다고 말한' 이야기입니다.
몽타주 기법(montage technique)이 여기서 독특하게 활용됩니다. 몽타주란 여러 장면을 이어 붙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편집 기법인데, 이 영화에서는 버벌의 진술을 시각화하는 방식으로 사용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쿠얀이 사무실 게시판을 바라보는 순간, 관객은 버벌이 눈앞의 사물들을 조합해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꾸며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가 처음 그 장면을 봤을 때 느꼈던 건 '충격'보다는 '내가 바보였구나'에 가까웠습니다.
카이저 소제(Keyser Söze)라는 인물의 설계 방식도 이 영화의 서사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카이저 소제는 누구도 직접 본 적 없는 전설적인 범죄 조직의 수장으로, 영화 내내 말로만 묘사됩니다. 이처럼 실체 없이 공포만 존재하는 인물을 맥거핀(MacGuffin)의 변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맥거핀이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동기 역할을 하지만 그 실체는 중요하지 않은 장치를 뜻합니다. 카이저 소제는 인물들이 움직이는 이유를 만들면서도, 정작 그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모든 공포가 무너지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화자의 신뢰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장치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버벌의 신체적 장애: 관객에게 '이 사람은 아니겠지'라는 선입견을 심어줌
- 쿠얀 형사의 과도한 확신: 키튼(Keaton)을 카이저 소제로 몰아가는 형사의 태도가 오히려 관객의 시선을 유도함
- 버벌이 증언 중 키튼을 감싸는 장면들: 겉으로는 변호처럼 보이지만, 실은 키튼에게 혐의를 씌우는 과정
- 사무실 게시판의 이름들: 버벌이 진술 중 사용한 인명과 지명이 모두 주변 사물에서 차용되었다는 마지막 반전
재관람해도 소름 돋는 이유
결말을 알고 보는 두 번째, 세 번째 관람에서 이 영화가 진짜 빛나기 시작합니다. 제 경험상 반전 영화 중 결말을 알고 봐도 더 재밌는 영화는 손에 꼽습니다. 유주얼 서스펙트는 그 중 하나입니다. 결말을 아는 상태에서 보면, 버벌이 형사의 말 한마디마다 즉각 거기에 맞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연기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케빈 스페이시가 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는지 두 번째 관람에서야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플롯 트위스트(plot twist), 즉 관객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결말 구조는 1990년대 이후 수많은 영화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국내에서도 유사한 서사 구조를 차용한 범죄 영화들이 꾸준히 나왔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Academy Awards) 기록에 따르면, 이 영화는 1996년 제68회 시상식에서 각본상과 남우조연상을 동시에 수상했습니다(출처: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저예산 독립영화가 아카데미 2관왕을 달성한 것 자체가 당시로선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브라이언 싱어(Bryan Singer) 감독이 이 영화 이후 엑스맨 시리즈로 넘어간 것을 생각하면, 그가 캐릭터 간의 심리전과 속임수를 다루는 데 얼마나 뛰어난지 이 작품에서 이미 증명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지금은 여러 사정으로 활동이 뜸해졌지만, 이 한 편만으로도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충분히 인정받을 만합니다.
결말을 안다고 해서 이 영화가 덜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모르고 보는 것과는 즐거움의 종류가 다릅니다. 만약 아직 결말을 모르신다면, 지금 바로 검색창을 닫고 영화를 먼저 보시길 권합니다. 그게 이 영화를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이고, 그 기회는 두 번 오지 않습니다. 결말을 이미 아신다면, 버벌이 형사에게 말을 건네는 첫 장면부터 다시 보십시오. 처음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영화가 보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