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37년 동안 이 영화 제목을 몰랐습니다. 중학교 3학년 어느 여름밤, TV에서 우연히 봤던 그 장면들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는데도요. 청바지에 스트라이프 줄무늬 흰 긴팔을 입고 빠르게 걷던 소녀, 그리고 그 엔딩의 여운. 결국 AI에게 기억나는 장면들을 설명해서 제목을 찾아냈고, 드디어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40년 가까이 묵혀뒀던 숙제가 풀린 느낌이었습니다.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데뷔작, 그 시절의 얼굴
제가 이 영화를 다시 찾아보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샤를로트 갱스부르라는 배우였습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작품들, 그러니까 안티크라이스트나 멜랑콜리아, 님포매니악에서 보여준 그녀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게 남아있었거든요. 극한의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배우라는 인상이었는데, 그 배우가 한때 프랑스의 국민 여동생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이 도저히 매치가 되질 않았습니다.
귀여운 반항아(원제: L'Effrontée)는 1985년 클로드 밀러 감독이 연출한 프랑스 성장 드라마입니다. 여기서 L'Effrontée란 프랑스어로 '버릇없는', '뻔뻔한', '무례한'을 뜻하는 단어로, 영어 제목은 An Impudent Girl입니다. 한국에서는 명화극장을 통해 방영되어 당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큰 반향을 일으켰고, 재방송 요청이 쏟아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샤를로트 갱스부르는 이 작품으로 세자르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하며 단숨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세자르상(César Award)이란 프랑스 영화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시상식으로, 흔히 '프랑스의 아카데미상'이라고도 불립니다(출처: 아카데미 프랑세즈).
영화를 보면 왜 그녀가 수상할 수 있었는지 바로 납득이 됩니다. 주인공 샤를로트는 13살, 엄마 없이 무심한 아버지와 사는 사춘기 소녀입니다. 밤중에 아빠 방에 들어가 같이 자고 싶다고 했다가 "사람 피곤하게 한다"는 말을 듣는 장면에서, 저는 그 소녀의 표정 하나에서 이미 이 배우의 내공을 느꼈습니다. 대사 없이 눈빛 하나로 외로움을 전달하는 것,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샤를로트의 삶에 등장하는 두 인물이 영화의 축을 이룹니다.
- 클라라(클로딜드 보동): 샤를로트의 동갑내기이자 천재 피아니스트 유망주. 부유하고 예쁘고 재능까지 넘친다.
- 장(장 필립 에코피): 샤를로트에게 접근하는 성인 남성. 누가 봐도 불순한 의도가 느껴진다.
이 두 관계 모두 처참하게 실패로 끝납니다. 성장 영화(Coming-of-age film)의 장르적 문법에 충실한 구조입니다. Coming-of-age란 주인공이 실패와 상처를 경험하면서 어른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과정을 그리는 서사 형식으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나 소나기 같은 작품들과 맥을 같이 합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가 겹쳐 보였던 것도 괜한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37년 뒤에 다시 본 영화, 달라진 건 영화가 아니라 저였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당시, 저는 샤를로트와 완전히 동일시했습니다. 아빠의 무심함도 짜증났고, 가정부 같은 아줌마의 잔소리도 속 긁히는 소리로만 들렸습니다. 그 감각이 너무 생생해서 엔딩 장면의 여운이 40년 가까이 지나도록 머릿속에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겨진 소녀의 뒷모습에 왠지 제 모습이 투영됐나 봅니다.
그런데 중년이 된 지금 다시 보니, 같은 장면이 완전히 다르게 읽혔습니다. 아빠의 무심함 뒤에 숨겨진 어떤 안간힘 같은 것이 보였고, 아줌마의 잔소리가 실은 걱정에서 나온 말이었다는 것도 느껴졌습니다. 영화는 그때 그대로인데, 저만 세상에 물들어 있었던 겁니다. 제 경험상 이런 감각의 변화가 오는 영화가 진짜 오래가는 영화입니다.
이 작품이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극적인 사건 없이도 사춘기의 질감을 정밀하게 포착한 연출력
-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데뷔 연기가 보여주는 미장센(mise-en-scène)의 완성도. 여기서 미장센이란 카메라에 담기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표정, 빛, 배경 등을 총괄하는 영화 연출 개념입니다.
- 시대가 바뀌어도 유효한 보편적 성장 서사
사실 자극적이고 흥미진진한 전개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큰 사건이 터지거나 극적인 반전이 있는 영화가 아니거든요. 그러나 제가 직접 다시 봐보니, 그 담백함이 오히려 이 영화의 힘이었습니다. 마치 수필 한 편을 읽은 것 같은 여운. 황순원의 소나기를 소녀의 감성으로 변주한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프랑스 국립영화센터(CNC)에 따르면 1980년대 프랑스 성장 영화는 누벨바그(Nouvelle Vague) 이후의 자연주의적 연출 기법을 계승하면서도 일상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여기서 누벨바그란 1950~60년대 프랑스에서 일어난 영화 혁신 운동으로, 기존의 과도한 연출 대신 즉흥성과 현실감을 강조한 스타일을 말합니다(출처: 프랑스 국립영화센터). 귀여운 반항아는 바로 그 흐름 위에 있는 작품입니다.
영화의 시작에 나오는 다이빙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남습니다. 싫든 좋든 뛰어내려야 하는 그 순간. 사춘기라는 게 결국 그런 거 아닐까요. 준비가 됐든 안 됐든 어느 날 뛰어들게 되고, 실패하고, 그래도 물 위로 올라오는 것. 저는 그 장면에서 이 영화 전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봤습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싶은 날, 혹은 어린 시절의 자신을 조용히 떠올려보고 싶은 날 꺼내 보시기를 권합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밤 선선한 바람을 맞는 것 같은 영화입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나면, 아마 그 시절의 자신에게 한마디쯤 건네고 싶어지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