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갑자기 "나 사실 1만 4천 년 살았어"라고 하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저는 처음에 그냥 웃었습니다. 그런데 2007년 개봉한 영화 맨 프롬 어스(Man from Earth)는 바로 그 황당한 전제를 가지고, 방 한 칸에서 두 시간 가까이 사람을 붙잡아 두는 기묘한 힘을 가진 작품입니다. 제작비 20만 달러 남짓의 이 영화가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직접 본 뒤 오래 생각했습니다.저예산이지만 몰입도가 남다른 이유이 영화의 제작 방식은 굉장히 단순합니다. 집 한 채, 배우 몇 명, 그리고 대사. 그게 전부입니다. 전체 제작비 약 20만 달러 중 각본료로 14만 달러가 쓰였다고 알려져 있고, 나머지가 배우 출연료와 촬영비였다고 합니다. 회상 장면 하나 없고, 특수효과는 물론 세트 변화도 없습니다.저..
영화를 다시 꺼내보는 데는 보통 이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스무 살 무렵 처음 봤던 영화를 서른이 넘어 다시 틀었을 때, 같은 장면에서 전혀 다른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거꾸로 살아도, 똑바로 살아도,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결국 같다는 걸 이 영화는 조용히 말해줍니다.원작 각색: 파편적인 단편을 스크린으로이 영화의 원작은 F. 스콧 피츠제럴드가 1922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입니다. 위대한 개츠비로 더 잘 알려진 피츠제럴드가 쓴 작품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도 많습니다. 원작은 "청춘이 인생의 끝에 놓여 있다면"이라는 아나톨 프랑스의 발언에서 착안해 쓴 기묘하고 짧은 이야기입니다.문제는 원작 자체가 지나치게 파편적이라는 점입니다. 사건들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어 그대..
걸작이 될 수 있었던 영화가 스스로 발목을 잡는 경우를 본 적 있으신가요? 2007년 대니 보일 감독의 선샤인을 처음 봤을 때 딱 그 기분이었습니다. 중반부까지 제 인생 영화가 될 뻔했는데, 보고 나서 한동안 이 영화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씁니다.태양을 가장 아름답게 담은 영상미SF 영화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선샤인이 처음으로 알려줬습니다. 죽어가는 태양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 이카루스 2호가 나아가는 장면들은, 단순한 우주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회화처럼 느껴졌습니다.영화는 시각적 연출 면에서 렌즈 플레어(lens flare)를 매우 공격적으로 활용합니다. 렌즈 플레어란 강한 광원이 카메라 렌즈에 직접 닿을 때 생기는 빛 번짐 현상인데, 일반적으로는 제거 대상으로 ..
인터스텔라를 다시 보고 나서 이상하게 중학교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처음 봤던 SF영화 한 편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거든요. 1997년작 콘택트. 일반적으로 인터스텔라가 우주 SF의 정점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 영화가 주는 철학적 무게는 그보다 훨씬 깊습니다. 칼 세이건이 우주에 던진 질문콘택트는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칼 세이건은 SETI(외계지적생명체탐색, 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연구의 상징적 인물로, 여기서 SETI란 전파 망원경 등을 통해 우주에서 오는 인위적인 신호를 탐색하는 과학 프로그램을 말합니다. 영화는 바로 그 실제 연구를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에 다른 SF들과 출발점이 다릅니다.주인공 엘..
콜은 처음부터 말콤이 귀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요?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본 게 1999년 극장이었습니다. 그 당시엔 반전이라는 단어조차 모르고 들어갔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나 다시 보면서 이상한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그 전제, 정말 맞는 걸까요?반전의 조건 — 플롯 트위스트가 성립하려면플롯 트위스트(Plot Twist)란 이야기 전개 도중 관객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서사가 뒤집히는 기법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그 사람이 사실은 귀신이었다"처럼 기존의 전제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장치입니다.식스 센스가 위대한 이유는 단순히 반전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반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관객이 끝까지 눈치채지 못하도록 설..
처음에 저는 토이스토리 1편을 처음 봤을 때 그냥 장난감이 뛰어다니는 아이들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1995년작이라는 사실도, 픽사(Pixar)의 첫 장편이라는 사실도 그다지 와닿지 않았죠. 그런데 다시 꺼내 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이건 30년이 지나도 전혀 낡지 않은, 오히려 어른이 된 후에 더 깊이 읽히는 작품이라는 걸요. 30년 전 그래픽, 지금 봐도 왜 빠져드는가저도 처음엔 솔직히 걱정했습니다. 1995년산 CG 애니메이션이니 얼마나 어색할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틀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몰입이 됐습니다. 왜일까 생각해보니, 이 영화의 힘은 그래픽이 아니라 캐릭터의 내면에 있었습니다.픽사가 토이스토리에 적용한 기술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CG(컴퓨터 그래픽스) 렌더링 방식이었습니다. 여기서 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