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작이 될 수 있었던 영화가 스스로 발목을 잡는 경우를 본 적 있으신가요? 2007년 대니 보일 감독의 선샤인을 처음 봤을 때 딱 그 기분이었습니다. 중반부까지 제 인생 영화가 될 뻔했는데, 보고 나서 한동안 이 영화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씁니다.
태양을 가장 아름답게 담은 영상미
SF 영화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선샤인이 처음으로 알려줬습니다. 죽어가는 태양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 이카루스 2호가 나아가는 장면들은, 단순한 우주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회화처럼 느껴졌습니다.
영화는 시각적 연출 면에서 렌즈 플레어(lens flare)를 매우 공격적으로 활용합니다. 렌즈 플레어란 강한 광원이 카메라 렌즈에 직접 닿을 때 생기는 빛 번짐 현상인데, 일반적으로는 제거 대상으로 여겨지지만 선샤인에서는 이를 의도적으로 극대화해 태양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표현하는 데 사용합니다. 처음에는 눈이 불편할 정도였는데, 나중엔 그게 오히려 영화의 분위기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걸 느꼈습니다.
수성이 태양 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에서 대원들이 경이로운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볼 때, 저도 같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장면이 영화 전체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입니다.
OST 역시 빠질 수 없습니다. 존 머피(John Murphy)와 언더월드(Underworld)가 함께 작업한 사운드트랙은 시각적 연출과 함께 상승 작용을 일으킵니다. 특히 캐파가 우주복을 입고 걸어가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음악과 영상의 싱크는 몇 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수준이었습니다. 당시엔 OST가 따로 출시되지 않아서 어떻게든 그 음악을 구해 듣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영상미와 음악이라는 두 축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그래비티(2013)나 인터스텔라(2014)가 없었더라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직접 봐온 경험으로는 선샤인이 그 두 영화의 시각적 언어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선샤인의 영상미를 가능하게 한 주요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렌즈 플레어를 의도적으로 활용한 태양 표현
- 수성 통과 장면 등 천문학적 소재를 활용한 경이로운 비주얼
- 존 머피·언더월드의 사운드트랙과 영상의 정밀한 싱크
- 한정된 우주선 내부 공간을 활용한 폐쇄 공포감 연출
핀베커, 이 영화의 가장 큰 논란
제가 이 영화를 두고 가장 많이 생각한 장면은 사실 마지막 30분입니다. 이카루스 1호의 선장 핀 베커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영화는 완전히 다른 장르로 전환됩니다. 서브리미널(subliminal) 편집 기법이 등장하는데, 이는 관객이 의식적으로 인지하기 어려운 극히 짧은 순간에 이미지를 삽입하는 편집 기술입니다. 쉽게 말해 0.1초 단위로 핀 베커의 일그러진 얼굴이 화면에 끼어드는 방식인데, 처음엔 이게 뭔가 싶어서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습니다.
솔직히 제 경험상 이 부분에서 관객이 반응하는 방식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감독의 의도를 납득한 사람과, 그냥 뜬금없는 공포 영화로 느낀 사람. 저는 솔직히 처음엔 후자였습니다. 1호 선장 나올 때까지는 정말 좋았는데, 갑자기 전신 화상을 입은 괴물 같은 존재가 튀어나오니 배신감이 컸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핀 베커라는 존재는 단순한 빌런이 아닙니다. 그는 인류를 구하는 임무를 짊어지고 태양 근처까지 갔다가 7년간 홀로 남겨진 인간입니다. 코스믹 호러(cosmic horror)라는 장르 개념이 있습니다. 코스믹 호러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우주적 규모의 존재 앞에서 느끼는 근원적인 공포와 무력감을 다루는 개념인데, 핀 베커는 그 공포를 정면으로 받아낸 존재입니다. 태양이라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 정신과 육체가 모두 무너진 인간의 모습을 그가 체현하고 있는 것이죠.
다만 이 의도가 관객에게 전달되는 방식에는 분명한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플래시 프레임(flash frame) 기법, 즉 극히 짧은 시간 동안 별개의 이미지를 삽입하는 편집 기술을 너무 반복적으로 사용하다 보니, 긴장감보다는 혼란감이 앞서는 순간이 생겼습니다. 영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이 편집이 효과적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립니다(출처: Roger Ebert 리뷰 아카이브). 저는 그 의도는 이해하지만, 결과적으로 중반부까지 쌓아올린 몰입감을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니 보일이라는 감독과 이 영화의 한계
대니 보일 감독은 트레인스포팅(1996), 28일 후(2002), 슬럼독 밀리어네어(2008)로 이어지는 필모그래피를 가진 영국의 거장입니다. 제가 직접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느낀 건, 그는 돈이 없을 때 더 창의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선샤인을 보며 내내 든 생각이 있습니다. 과거에 제한된 예산으로 기막힌 장면을 뽑아내던 감독이, 막상 큰 제작비를 받으니 오히려 그 규모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보다 더 나은 장면을 낼 수 있었을 텐데, 싶은 부분들이 후반부에 여러 곳 있었습니다.
영화의 주제 의식 자체는 탄탄합니다. 이카루스(Icarus)라는 선박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아 추락한 인물의 이름으로, 영화 전체의 서사를 관통하는 상징입니다. 선장이 자신을 희생해 대원들을 살리는 장면과, 부선장 하비가 혼자 살아남으려다 우주의 미아가 되는 장면을 나란히 두는 방식은 그 자체로 영리한 대비입니다. 대니 보일 감독은 개봉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통해 집단의 생존을 위해 개인이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가를 묻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출처: IMDb 선샤인 영화 페이지).
영화에서 대니 보일이 던지는 질문들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 다수를 살리기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결정은 누가, 어떤 자격으로 내릴 수 있는가
- 리더의 권위에 의한 결정과 다수결 투표, 어느 쪽이 더 정당한가
- 인류를 위한 사명감을 혼자 짊어진 인간은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이 질문들만으로도 선샤인은 충분히 볼 가치 있는 영화입니다. 후반부의 장르 변환이 아쉬운 건 사실이지만, 그 탓에 앞의 70%를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선샤인은 저평가된 영화임이 분명합니다. 핀 베커 문제만 없었더라면 이라는 말을 저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직접 보고 나서 그 말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우주라는 공간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아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앞에서 무엇이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지를 이렇게 아름답게 담아낸 영화는 많지 않습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중반부까지만이라도 한 번 경험해 보시길 권합니다. 마지막 30분에 대한 판단은 직접 보고 내리셔도 늦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