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지우면 사랑도 사라질까요. 이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이터널 선샤인을 처음 봤을 때 저도 막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지워도 다시 끌리는 두 사람을 보면서, 사랑이 기억에 있는 게 아니라 몸과 습관 어딘가에 새겨지는 것이 아닐까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비선형 서사가 처음엔 낯설었습니다이터널 선샤인의 이야기 구조는 선형 서사와 정반대입니다. 선형 서사란 시간 순서대로 사건이 전개되는 방식인데, 이 영화는 그 반대로 현재와 기억 삭제의 역순이 동시에 뒤섞여 흐릅니다. 처음 보는 분들 중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시는데, 저도 첫 관람에서 타임라인을 완전히 놓쳤습니다.영화는 사실상 2월 13일부터 2월..
솔직히 저는 37년 동안 이 영화 제목을 몰랐습니다. 중학교 3학년 어느 여름밤, TV에서 우연히 봤던 그 장면들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는데도요. 청바지에 스트라이프 줄무늬 흰 긴팔을 입고 빠르게 걷던 소녀, 그리고 그 엔딩의 여운. 결국 AI에게 기억나는 장면들을 설명해서 제목을 찾아냈고, 드디어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40년 가까이 묵혀뒀던 숙제가 풀린 느낌이었습니다.샤를로트 갱스부르의 데뷔작, 그 시절의 얼굴제가 이 영화를 다시 찾아보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샤를로트 갱스부르라는 배우였습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작품들, 그러니까 안티크라이스트나 멜랑콜리아, 님포매니악에서 보여준 그녀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게 남아있었거든요. 극한의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배우라는 인상이었는데, 그 배우가 한때 ..
1950년 플라스틱 생산량은 연간 200만 톤이었습니다. 2020년에는 그 150배인 3억 톤이 만들어졌습니다. 처음 월-E를 봤을 때는 그냥 눈물 찔끔 나는 귀여운 로봇 영화였는데, 이 숫자를 알고 나서 다시 보니 기분이 묘하게 달라졌습니다.2050년의 쓰레기 산, 이미 예고된 현실월-E에서 쓰레기가 건물 높이까지 쌓인 지구 풍경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솔직히 "설정이 좀 과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2008년에 개봉한 영화니까 당시 기준으로는 꽤 비현실적인 상상력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수치를 놓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2050년까지 전 세계에서 누적 생산될 플라스틱은 약 340억 톤으로 예측됩니다. 그중 3분의 1인 약 120억 톤이 쓰레기로 전환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합니다. 영화 속 2..
이 영화를 가볍게 보다가 중반부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톰 크루즈, 페넬로페 크루즈, 카메론 디아즈가 한 화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볼 이유가 충분한데, 정작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그보다 훨씬 묵직했습니다. 꿈과 현실의 경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 영화 한 편이 이렇게 오래 머릿속에 남을 줄은 몰랐습니다.꿈과 현실, 어디서부터 무너지는가영화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주인공 데이빗이 살인죄로 수감된 채 정신과 의사와 면담을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하거든요. 얼굴에는 가면을 쓰고 있고, 의사는 그의 과거를 끌어내려 합니다. 저는 이 오프닝 나레이션을 듣는 순간부터 뭔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지금도 그 OST가 가끔 생각날 정도니까요.데이빗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
친구가 갑자기 "나 사실 1만 4천 년 살았어"라고 하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저는 처음에 그냥 웃었습니다. 그런데 2007년 개봉한 영화 맨 프롬 어스(Man from Earth)는 바로 그 황당한 전제를 가지고, 방 한 칸에서 두 시간 가까이 사람을 붙잡아 두는 기묘한 힘을 가진 작품입니다. 제작비 20만 달러 남짓의 이 영화가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직접 본 뒤 오래 생각했습니다.저예산이지만 몰입도가 남다른 이유이 영화의 제작 방식은 굉장히 단순합니다. 집 한 채, 배우 몇 명, 그리고 대사. 그게 전부입니다. 전체 제작비 약 20만 달러 중 각본료로 14만 달러가 쓰였다고 알려져 있고, 나머지가 배우 출연료와 촬영비였다고 합니다. 회상 장면 하나 없고, 특수효과는 물론 세트 변화도 없습니다.저..
영화를 다시 꺼내보는 데는 보통 이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스무 살 무렵 처음 봤던 영화를 서른이 넘어 다시 틀었을 때, 같은 장면에서 전혀 다른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거꾸로 살아도, 똑바로 살아도,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결국 같다는 걸 이 영화는 조용히 말해줍니다.원작 각색: 파편적인 단편을 스크린으로이 영화의 원작은 F. 스콧 피츠제럴드가 1922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입니다. 위대한 개츠비로 더 잘 알려진 피츠제럴드가 쓴 작품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도 많습니다. 원작은 "청춘이 인생의 끝에 놓여 있다면"이라는 아나톨 프랑스의 발언에서 착안해 쓴 기묘하고 짧은 이야기입니다.문제는 원작 자체가 지나치게 파편적이라는 점입니다. 사건들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어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