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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영화가 2026년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뤽베송 감독의 제5원소가 바로 그렇습니다. 처음 영화관에서 봤을 때 "뭐 이런 영화가 다 있나" 싶었는데, 두 번 보니 재미있고 세 번 보니 진짜 멋있더라고요.
초등학교 때 상상한 세계관이 스크린이 되다
뤽베송이 이 영화의 기초 스토리를 초등학생 시절에 구상했다는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그 상상력이 스크린 위에 그대로 펼쳐졌다는 게 저는 지금도 놀랍습니다. 단순히 외계인이 나오는 SF가 아니라, 물과 불과 바람과 흙이라는 고대 4원소론에 다섯 번째 원소가 더해지는 신화적 세계관을 품고 있습니다. 여기서 4원소론이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세상의 모든 물질이 불, 물, 공기, 흙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상을 말하는데, 영화는 이 고전 철학을 SF 블록버스터와 이음새 없이 연결해냅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1917년 이집트 벽화를 해독하는 고고학자와 그 비밀을 물려받은 외계인들의 장면이 나옵니다. 그로부터 300년 후 절대악이 나타나는 구조, 즉 시간 축을 수백 년 단위로 두고 설계한 세계관의 스케일이 남다릅니다.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놀란 건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권선징악이라는 메시지 자체는 유치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이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어 오히려 설득력을 가집니다.
미장센(mise-en-scène) 측면에서도 이 영화는 독보적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 요소, 즉 배우의 움직임, 조명, 색채, 의상, 세트를 총체적으로 연출하는 개념입니다. 제5원소는 미래 도시의 수직적 공간감, 강렬한 원색 배합, 그리고 장 폴 고티에가 디자인한 코스튬으로 이 미장센을 극대화합니다. 특히 밀라요보비치가 입은 밴드 형태의 의상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될 만큼 파격적이었습니다.
뤽베송이 설계한 SF 영화문법
제5원소가 당시 다른 SF와 구분되는 가장 큰 이유는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에 있습니다.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과 순서를 말하는데, 이 영화는 영웅의 여정이라는 전통적 구조를 따르면서도 중간중간 코미디와 오페라를 삽입해 리듬을 전혀 다르게 흐릅니다. 절대악이 우주선을 집어삼키는 긴박한 장면 직후, 크리스 터커가 DJ처럼 생방송 중계를 하는 장면이 이어지는 편집은 당시 관객 입장에서 꽤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여러 번 보면서 느낀 건데, 이 영화의 힘은 캐릭터마다 역할의 경계가 명확하다는 점입니다. 코벤(브루스 윌리스)은 전직 요원 출신의 냉소적인 택시기사이고, 리루(밀라요보비치)는 모든 것을 처음 접하는 듯 반응하는 신체적 완성체이며, 루비 로드(크리스 터커)는 이야기의 유활유 역할을 합니다. 각자의 결을 살려 충돌시키는 연출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제가 인상 깊었던 건 흑인 대통령을 자연스럽게 설정한 1997년의 시각입니다. 당시 할리우드 기준으로는 분명 앞서간 선택이었고, 영화가 미래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인종 차별을 지우려는 의식적인 시도가 있었다고 봅니다. SF 장르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사회적 상상력을 투영하는 매체가 될 수 있다는 걸 이 영화가 보여주는 셈입니다. SF 영화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는 미국영화협회(AFI)도 장르 영화를 분석하면서 미래 사회상 반영 문제를 꾸준히 언급합니다(출처: 미국영화협회).
밀라요보비치와 게리 올드만, 역할과 하나가 된 배우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밀라요보비치가 이렇게까지 역할에 녹아들 수 있는 배우인지 이 영화 보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리루라는 캐릭터는 갓 태어난 것처럼 세계를 낯설게 경험하면서도 전투 본능은 극도로 정밀한, 상반된 두 가지를 동시에 표현해야 합니다. 그 균형을 밀라요보비치가 몸으로 구현했고, 지금 다시 봐도 그 연기는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게리 올드만의 악역 조그는 또 어떻습니까. 레옹에서 보여준 악역 연기와 결을 달리하면서도 비슷한 강도를 유지합니다. 캐릭터 자체의 깊이는 레옹의 스탠스필드보다 얕다고 볼 수 있지만, 게리 올드만은 주어진 분량 안에서 완벽하게 존재감을 채웁니다. 처음 봤을 때 악역이 게리 올드만인지 몰랐다는 분들이 많은데, 저도 그랬습니다. 그만큼 캐릭터에 완전히 녹아들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 놓치기 쉬운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오페라 디바 풀러바라나의 무대 공연 장면은 실제 소프라노 창법과 전자음악을 합성한 독창적인 음악 편집이 핵심입니다.
- 코벤이 리루에게 인류의 역사를 보여주는 장면은 영화 전체 주제인 '사랑'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키는 연출 장치입니다.
- 신부 코넬리우스 캐릭터는 종교와 고대 지식의 연결고리를 상징하며, 세계관의 신뢰도를 높이는 역할을 합니다.
- 루비 로드의 라디오 중계 캐릭터는 오늘날 인플루언서 문화를 1997년에 선점한 설정이라는 점에서 새롭게 읽힙니다.

30년이 지나도 이 영화가 낡지 않는 이유
영상 품질이 아무리 좋아도 세계관이 빈곤하면 금방 낡아 보입니다. 반대로 세계관이 탄탄하면 화면의 해상도나 CG의 세밀함이 조금 아쉬워도 영화 자체는 살아남습니다. 제5원소가 딱 그 경우입니다. 외계인 묘사가 지금 기준으로는 다소 단순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도시 설계와 공간 연출, 이야기의 밀도가 이를 충분히 커버합니다.
색채 심리학(color psychology)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오렌지와 파란색의 대비를 반복합니다. 색채 심리학이란 색깔이 인간의 감정과 인지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분야인데, 제5원소는 절대악을 어둡고 차가운 색조로, 주인공들을 따뜻하고 생동감 있는 색으로 대비시키면서 시각적 서사를 강화합니다. 이런 의식적인 연출이 지금 봐도 이 영화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한국 SF와 비교하자면, 2003년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가 국내에서 비슷한 시도를 했고 스케일은 훨씬 작지만 철학적 밀도는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한국 SF가 오랫동안 넘지 못했던 벽은 기술이 아니라 시나리오의 철학적 기반이었습니다. 제5원소는 그 기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교과서 같은 작품입니다. 영화 산업 분석기관인 박스오피스 모조에 따르면, 제5원소는 개봉 당시 전 세계 2억 6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며 프랑스 영화 사상 최대 흥행 기록을 세웠습니다(출처: Box Office Mojo).
결국 제5원소는 보면 볼수록 다르게 읽히는 영화입니다. 처음엔 그냥 신기한 SF로 봤다가, 다시 보면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되고, 또 보면 인류 문명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요즘 시리즈로 뽑아먹는 히어로물보다 30년 전에 만든 이 영화 한 편이 훨씬 오래 머릿속에 남는 건, 바로 그 이유에서입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지금 당장 보셔도 전혀 늦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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