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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아직 초등학생이었고, 비디오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판타지 영화는 어차피 아이들용 동화"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1986년작 라비린스는 그 편견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완벽하게 무너뜨립니다. 제니퍼 코넬리의 미모와 데이빗 보위의 카리스마, 그리고 짐 헨슨 감독의 장인 정신이 만들어낸 세계는 지금 다시 봐도 전혀 낡지 않았습니다.
비디오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돌려봤던 기억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어릴 때 TV에서 우연히 본 이 영화가 이렇게 오래,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에 남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제가 처음 접했을 때는 '사라의 미로여행'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됐는데, 화면 속 소녀가 기괴한 미로 안을 헤집고 다니는 장면에서 그냥 멈춰버렸습니다. 비디오 가게를 달려가 빌려보고 싶었지만 동네 가게에는 재고가 없었고, 결국 TV 방영 때 비디오 녹화를 떠서 무한 반복 재생을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릴 때 재밌었던 영화는 어른이 되면 시시해진다"고들 하지만, 저는 이 영화만큼은 그 공식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중년이 된 지금 다시 봐도 환상나라에 처음 발을 디뎠던 그 설렘이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오히려 어른의 눈으로 보니 사라의 성장 서사나 가족 관계의 균열 같은 부분들이 더 뚜렷하게 보여서, 그때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즐기게 됩니다.
라비린스를 처음 본 분들이라면 아마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셨을 겁니다. 처음엔 판타지 세계의 생김새에 압도되고, 두 번째 볼 때는 데이빗 보위에게 빠지고, 세 번째에는 이 영화가 결국 한 소녀의 심리 여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애니메트로닉스의 기적, CG 없이 살아있는 생명체를 만들다
이 영화의 진짜 경쟁력을 말할 때 저는 언제나 애니메트로닉스(Animatronics)를 먼저 꺼냅니다. 애니메트로닉스란 전자 장치와 기계 구조를 인형 내부에 내장해 실시간으로 표정과 신체 동작을 구현하는 특수효과 기법입니다. 쉽게 말해, 배우가 리모컨으로 조종하거나 내부에서 직접 움직이면서 캐릭터가 진짜 살아 숨쉬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짐 헨슨 감독은 어린이 TV 프로그램 머펫 쇼와 세서미 스트리트를 통해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인형 제작 기술을 축적한 인물이었습니다. 라비린스는 그 기술력이 극장 스크린 규모로 폭발한 작품입니다. 왜소증 배우들이 직접 분장을 하고, 그 위에 애니메트로닉스 장치가 씌워져 움직이는 방식이라 지금 봐도 어색함이 거의 없습니다. 짐 헨슨의 아들 브라이언 헨슨이 직접 인형술사로 참여해 호글 캐릭터의 기계 장치를 조종하고 목소리 연기까지 맡았다는 사실도 인상적입니다.
제가 직접 비하인드 자료들을 찾아보니, 이 영화에서 사용된 퍼펫(Puppet) 제작에 수백 명의 장인이 투입됐다고 합니다. 퍼펫이란 인형술사가 직접 손이나 막대로 조종하는 인형을 의미하는데, 라비린스에서는 고블린 군중 신처럼 수십 개의 퍼펫이 동시에 움직이는 장면에서 그 규모가 절정에 달합니다. CG 한 줄 없이 이 장면을 실제로 촬영했다는 것을 알고 나면 경외감이 생깁니다.
라비린스의 퍼펫과 애니메트로닉스 기술이 이후 영화 산업에 미친 영향은 작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 짐 헨슨 컴퍼니는 지금도 영화와 방송에서 실물 기반 특수효과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출처: 짐 헨슨 컴퍼니 공식 사이트).
짐 헨슨 감독이 설계한 성장 서사의 구조
라비린스를 단순한 판타지 모험 영화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핵심은 사라의 심리적 분리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라는 재혼 가정 안에서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사춘기 소녀입니다. 또래와 어울리지 않고 인형을 가지고 놀며 동화책 대사를 혼자 외우는 모습은, 현실 적응을 거부하고 내면의 환상 세계에만 머물려는 심리를 보여줍니다.
발달심리학에서는 이 시기를 '개별화(Individuation)' 단계라고 부릅니다. 개별화란 아동이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하며 자아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사라가 미로 안에서 겪는 모든 시련은, 그 개별화 과정을 상징적으로 압축해놓은 서사입니다. 미로를 통과하면서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친구를 얻고, 마지막에 마왕의 유혹을 스스로 거부합니다. "당신은 나를 지배할 수 없어"라는 마지막 대사는 그래서 단순한 주문이 아니라 자아 선언에 가깝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악당인 마왕 자레스가 실제로는 아이를 납치한 뒤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겁게 돌봐준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라가 더 쉽게 동생을 버리려 했죠. 이 뒤틀린 구도는 테리 존스 특유의 괴팍한 영국식 코미디 감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테리 존스는 영국 코미디 그룹 몬티 파이튼(Monty Python)의 멤버로 이 영화의 각본을 썼는데, 몬티 파이튼은 60~70년대 영국 BBC를 통해 부조리 개그를 TV에 정착시킨 전설적인 팀입니다. 그의 손을 거치면서 라비린스는 어린이 판타지인 동시에 어른도 비틀어 읽을 수 있는 텍스트가 되었습니다.
사라가 동생을 구하고 돌아온 뒤 자신의 인형을 동생에게 건네주는 장면은, 이 모든 성장 서사의 결론입니다. 제가 어릴 때는 그냥 뭉클하다고만 느꼈는데, 지금 다시 보니 그 작은 행동 하나에 영화 전체의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영화 속 사라 방에 꽂혀있는 책들이 오즈의 마법사, 괴물들이 사는 나라 등 모두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혼동하는 소녀의 이야기'라는 점도 의도적인 배치입니다. 짐 헨슨 감독은 이 디테일들을 통해 라비린스를 단지 볼거리가 풍부한 판타지가 아니라, 관객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영화로 설계한 것입니다.

데이빗 보위라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
데이빗 보위 없는 라비린스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가 리메이크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어떤 배우를 캐스팅해도 자레스 역할은 어색할 것입니다. 글램 록(Glam Rock)의 대부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게 아닙니다. 글램 록이란 1970년대 영국에서 유행한 음악 장르로, 화려한 의상과 무대 퍼포먼스, 젠더 경계를 허무는 이미지를 특징으로 합니다. 데이빗 보위는 그 장르의 상징적 인물이었고, 라비린스 속 타이즈 차림의 자레스는 그 시절 보위의 무대 미학을 그대로 스크린으로 옮겨놓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라비린스의 뮤지컬적 완성도를 가능하게 한 것도 결국 보위 본인이었습니다. 그는 영화 속 모든 곡을 직접 작사·작곡하고 노래했습니다. Magic Dance, As the World Falls Down 같은 곡들은 영화를 넘어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 지금도 소비됩니다. 저도 영화를 처음 본 뒤 사운드트랙을 구하려고 무진장 애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촬영 당시 제니퍼 코넬리가 15세였다는 사실을 감안해, 당시 38세였던 보위가 각본에 있던 키스 장면을 완강히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이 일화는 그의 직업적 윤리 감각을 보여주는 동시에, 영화가 끝내 순수한 판타지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데이빗 보위는 2016년 1월 6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같은 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추모 상영이 열렸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릅니다. 스크린으로 라비린스를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의 공식 음악 아카이브와 바이오그래피는 지금도 공식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출처: 데이빗 보위 공식 사이트).
라비린스를 처음 보실 분들을 위해 핵심 관람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퍼펫과 애니메트로닉스 장면: CG 없이 만들어진 생명체들의 움직임을 집중해서 보세요.
- 데이빗 보위의 무대 의상과 분장: 글램 록 시절 스타일이 그대로 반영된 비주얼입니다.
- 사라 방 책장의 책 제목들: 모두 같은 주제를 가진 작품들로 의도적으로 배치된 소품입니다.
- 마지막 계단 방 장면: 에셔(M.C. Escher) 판화에서 영감을 받은 세트를 카메라 트릭과 실제 구조물로 구현했습니다.
라비린스는 인생에서 딱 세 편만 볼 수 있다면 반드시 포함시키겠다고 말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환상나라의 설렘이 중년이 된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 영화가 얼마나 특별한지 증명합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지금 당장 찾아보시길 추천합니다. 판타지 영화의 정석이 무엇인지, 제 경험상 이 영화 하나로 충분히 납득하실 겁니다.
참고: https://youtu.be/TGEuqqz8Ffc
https://www.henson.com
https://www.davidbowi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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