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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어쩔 수가 없다 (동기, 블랙코미디, 계급 하락)

by 와일드그로브 2026. 3. 10.

영화 어쩔 수가 없다 대표 이미지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는 개봉 전부터 베니스 국제 영화제 초청으로 기대치가 한껏 올라간 작품입니다. 솔직히 저도 기대를 많이 했는데, 막상 보고 나서 든 첫 감정은 "이 영화, 웃겨야 할지 슬퍼야 할지 모르겠다"였습니다. 해고된 한 남자의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불편하게 남을 줄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동기가 약하다는 말, 저는 다르게 봤습니다

이 영화를 두고 가장 많이 나오는 비판이 만수의 동기가 약하다는 것입니다. 25년 근속 후 해고, 재취업 실패, 가장으로서의 역할 상실. 이게 사람을 해칠 이유가 되냐는 거죠. 저도 처음엔 비슷하게 느꼈습니다. 40~50대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황을 이 정도로 극단화하는 게 납득이 되냐는 의구심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건 만수의 정당성이 아니라, 사람이 어디까지 미끄러질 수 있는가입니다. 실직이 단순한 경제적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붕괴로 이어지는 과정, 영화는 그걸 아주 끈질기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로섬 게임이라는 개념이 핵심입니다. 제로섬 게임이란 한쪽이 이득을 보면 반드시 다른 쪽이 손해를 보는 구조를 뜻합니다. 영화 속 만수는 취업 자리는 딱 하나이고 경쟁자를 제거하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다는 이 논리에 완전히 포획된 인물입니다. 물론 현실에서 자리는 만들어질 수도, 업종을 바꿀 수도 있죠. 그런데 만수는 그런 가능성 자체를 차단한 채 극단적인 선택을 밀어붙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무서움은 만수의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를 가능하게 만든 닫힌 사고방식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오히려 영화가 현실을 너무 잘 건드렸다고 느꼈습니다. 산업 구조 조정이 반복되면서 중년 남성의 실업률이 꾸준히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지금, 만수의 논리가 완전히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 자체가 불편했습니다. 실제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40~50대 남성의 비자발적 실직 비율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출처: 통계청).

블랙코미디라는 형식이 왜 이 이야기에 맞는가

이 영화가 유독 불편하게 남는 이유 중 하나는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입니다. 블랙코미디(black comedy)란 비극적이거나 불편한 소재를 유머로 포장하는 서사 기법을 말합니다. 웃기면서도 동시에 씁쓸하고, 웃고 나서 그 웃음이 어딘가 찝찝하게 남는 방식입니다. 이병헌의 연기가 중간중간 코믹하다는 비판도 있었는데, 저는 오히려 그게 이 영화의 가장 잘된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원작 소설 속 만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냉혹하게 인간성을 잃어가는 인물입니다. 코믹 요소가 전혀 없죠. 반면 영화 속 만수는 초반에 실실 웃기고 어수룩하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그 웃음이 점점 무거워집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이 변화가 체감됐는데, 처음엔 그냥 웃겼다가 나중엔 같은 장면인데 웃기지가 않더라고요. 그 오묘한 감정의 변화가 소설보다 입체적으로 느껴진 이유였습니다.

아이러니(irony)라는 서사 장치도 이 영화에서 아주 강하게 작동합니다. 아이러니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과 실제 의미가 반대인 상황을 뜻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강한 아이러니는 결말입니다. 완전 범죄를 성공시키고, 집을 지키고, 취업까지 했는데 관객은 그게 해피엔딩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저도 영화가 끝나고 한동안 멍하게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얻은 것들이 분명히 있는데, 이상하게도 패배한 사람처럼 느껴졌거든요.

이 불일치가 바로 블랙코미디가 가장 잘 작동하는 지점입니다. 웃음을 통해 비극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저는 이 영화의 형식이 이 이야기에 꽤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고 봤습니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처연한 감정을 남기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성공해도 카타르시스가 없다: 만수의 범죄가 성공해도 관객은 쾌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구조 자체가 잘못된 토대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 가족이 유지되지만 가족이 아니다: 마지막 장면의 가족은 겉모습은 처음과 같지만 내부는 이미 무너졌습니다.
  • 취업에 성공했지만 다시 해고가 예정돼 있다: AI 기반 소등 시스템이 그 자리마저 없애버릴 것임을 영화는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계급 하락 공포가 만드는 폭력의 논리

이 영화를 기생충과 비교하는 시각이 많은데, 저는 조금 결이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기생충은 계급 구조를 선명하게 해부하는 영화입니다. 반지하, 대저택, 냄새, 폭우처럼 장면마다 계급 간 간극을 시각적으로 쌓아 올리고, 관객은 그 구조를 비교적 명확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다릅니다. 이 영화는 구조를 설명하기보다 그 구조 안에서 한 인간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를 따라갑니다.

계급 하락(class descent)이란 개념이 여기서 핵심입니다. 계급 하락이란 경제적 지위나 사회적 위치가 하강하는 과정을 뜻하며, 단순한 소득 감소를 넘어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의 붕괴로까지 이어집니다. 만수에게 해고는 월급이 끊기는 사건이 아닙니다. 25년 동안 쌓아 온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공포가 그를 점점 공격적으로 만듭니다.

체면(face)이라는 개념도 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폭력의 연료입니다. 체면이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타인에게 인정받는 지위와 이미지를 뜻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중년 가장에게 체면은 단순한 자존심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의 역할과 직결됩니다. 만수는 가족 앞에서 실패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 공포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가능하게 만드는 내적 연료로 작동합니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중고령 남성 실직자의 경우 재취업까지 평균 12개월 이상이 소요되며 이 기간 동안 심리적 고립감과 자존감 하락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출처: 한국노동연구원). 영화가 만수의 1년여를 따라가는 방식이 이 현실과 겹치면서, 저는 이 영화가 단순한 범죄 스릴러가 아니라 실업의 심리적 풍경을 다룬 영화라고 느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원작 소설에서는 같은 처지의 경쟁자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는 모습이 만수와 대비를 이루는데, 영화에서는 등장하는 모든 실직자가 불행하게 그려집니다. 이렇게 되면 만수의 선택이 필연처럼 보여서 오히려 사회 구조 비판의 날이 무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인물이 있었더라면, 만수의 닫힌 사고방식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을 것 같습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결국 어떤 영화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웃기면서 무서운 영화, 해피엔딩처럼 끝나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영화입니다. 박찬욱 감독이 오래 들여다본 인간의 어두운 면이 이번엔 아주 익숙한 얼굴로 등장합니다. 바로 우리 주변 어딘가에 있을 법한 중년 남성의 얼굴로요. 이 영화에 불편함이 남는다면, 그 불편함이 이 작품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박찬욱의 필모그래피에서 복수는 나의 것이나 박쥐를 인상 깊게 봤다면, 이 영화는 같은 맥락에서 함께 보면 더 흥미롭게 보일 것입니다.


참고: https://youtu.be/InaRMazLFH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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