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영 당시 흔히들 “박찬욱 감독표 기생충”이라고 말하곤 했죠. 저도 얼마 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다시 본 터라, 두 작품을 비교하며 보는 재미를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기생충보다는 올드보이가 더 강하게 떠올랐습니다.
기생충이 계급 구조를 해부하며 장면마다 메시지를 박아 넣는 쪽이라면, 어쩔 수가 없다는 사회 비판의 칼날을 전면에 세우기보다는 ‘만수’라는 인물의 붕괴와 타락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데 더 집중한 느낌이었거든요.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긴 마찬가지”라는 대사가 박찬욱 영화의 정서를 요약하듯, 이번 작품도 끝까지 묵직하고 어두운 방향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래서 관람 후에는 영화의 결말이 아니라, 그 결말까지 사람을 밀어 넣는 ‘과정’ 자체가 더 오래 남았습니다.
기생충이 아니라 올드보이가 떠오른 이유
기생충을 볼 때 제가 강하게 받았던 감정은 ‘현실의 구조를 찌르는 선명함’이었습니다. 반지하와 대저택, 냄새와 폭우 같은 장치를 통해 빈부격차를 정교하게 보여주고, 마지막엔 아주 미미하게라도 “희망의 착각”을 남긴 채 끝나죠. 그래서 관객은 비극을 보면서도 어딘가에 얇은 숨구멍이 남아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반면 어쩔 수가 없다는 현실을 꼬집으려는 의도가 아예 없진 않지만, 그 메시지가 기생충처럼 또렷하게 박히기보다는 주인공의 선택이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깊게 추락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관객이 사회를 읽기 전에 인간을 먼저 보게 되는 구조입니다.
저는 이 지점이 올드보이 이후 박찬욱 감독이 반복해온 감정, 즉 구원보다 침잠에 가까운 결말 정서와 맞닿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올드보이가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인물을 끝없이 내려앉히며 관객을 그 어둠 속에 가둬버렸다면, 어쩔 수가 없다는 일상의 붕괴를 출발점으로 삼아 같은 방식의 침잠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남는 질문이 달라집니다. “왜 이런 사회가 됐나”보다, “한 사람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나”가 더 크게 남는 느낌이었습니다. 그게 저에게는 기생충보다 올드보이가 먼저 떠오른 이유였습니다.
완벽한 일상에서 시작되는 균열
영화는 이상적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만수 가족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림 같은 마당에서 바비큐를 굽고, 큰 개 두 마리와 아이들이 뛰노는 풍경은 ‘완성된 삶’처럼 보이죠. 손예진이 연기한 미리의 존재감도 그 안정감을 더합니다. 어쩌면 너무 이상적이라서, 관객 입장에서는 “이 행복이 오래 갈 리 없겠지” 하는 예감이 먼저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만수에게 해고 통보가 떨어지는 순간, 그 예감은 너무 쉽게 현실이 됩니다.
더 잔인한 건 만수와 같은 처지가 한둘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해고된 사람들은 서로의 동료가 아니라 곧바로 경쟁자가 되고, 그 경쟁은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자리’의 문제로 바뀌어버립니다. 만수는 자신보다 훨씬 좋은 스펙을 가진 범모, 시조, 선출을 마주하며 자부심이 통째로 부정되는 감각에 휩싸입니다. 저는 이 장면들이 주는 모멸감이 꽤 현실적으로 느껴져서 불편했습니다. 단순히 돈이 줄어드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쌓아 올린 삶의 가치’가 타인의 스펙 앞에서 종잇장처럼 찢기는 느낌이었으니까요.
여기서부터 영화는 “재취업”이라는 목표를 넘어, ‘자리를 빼앗긴 인간이 어떻게 괴물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집니다. 이 과정이 무섭게 다가오는 이유는, 만수가 처음부터 악인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평범하고 성실한 가장으로 출발했기에, 관객은 어느 순간부터 그의 변화를 ‘납득’하려다 스스로를 의심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이 사람을 이해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이해하려 애쓰는 척하는 건가” 같은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오더군요.
추락을 지켜보게 만드는 잔혹한 재미
만수가 경쟁자들을 하나씩 ‘없애버리겠다’고 작정하는 순간, 영화는 더 이상 현실 풍자보다 타락의 드라마가 됩니다. 내가 도달할 수 없다면 남도 도달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발상은 처절하고 절박하지만 동시에 비겁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 비겁함을 쉽게 단죄하지도, 그렇다고 변명해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관객이 불편해할 걸 알면서도, 만수를 끝까지 따라가게 만드는 방식으로 몰입을 강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보는 내내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상하게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게 이 영화의 잔혹한 재미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만수의 범행을 눈치챘고 목격했고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른 척 눈감아주는 인물들이 등장할 때 영화는 한 번 더 차가워집니다. 타인의 생명과 존엄이 파괴된 자리 위에서 웃고 있는 미리와 아들 시원의 얼굴, 자신의 치부를 들켰다는 이유로 남편을 직접 제거하는 아라의 선택까지, “타락은 특정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 전체에 번진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습니다. 여기서 타락은 도덕적 훈계의 대상이라기보다, 환경과 공포가 만든 전염병처럼 보입니다.
다만 저는 메시지가 조금 뜨뜻미지근하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기생충처럼 현대 사회의 단면을 정확히 찌르며 장면마다 의미를 촘촘히 심어두는 방식이라기보다는, 타락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어쩔 수 없었나”라는 질문만 남기는 느낌이었거든요. 깊이가 없다는 말이라기보다, ‘사회 비판’의 칼끝이 선명하게 박히기보다는 ‘인간 심연’ 쪽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는 인상입니다.
그래서 결말이 남기는 감정은 확실히 박찬욱 쪽입니다. 봉준호가 아주 희미한 희망 한 오라기라도 남겨 관객이 현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면, 박찬욱은 끝까지 “가라앉는 건 피할 수 없다”는 체감을 남깁니다.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결국 가라앉는다는 말처럼, 누군가가 무너질 때 그 무너짐은 크기만 다를 뿐 방향은 같다는 것. 저는 그 냉정함 때문에 영화가 더 오래 남았고, 동시에 더 답답하게 남았습니다.